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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의 장미 전쟁: 왕좌를 위한 피비린내 나는 전투


장미 전쟁의 배경: 영국 왕좌를 둘러싼 대립


15세기 중반, 잉글랜드는 심각한 정치적 혼란에 빠져들었다. 이 혼란의 중심에는 두 주요 가문, 요크 가문과 랭커스터 가문이 있었다. 이 두 가문은 각각 하얀 장미와 붉은 장미를 상징으로 내세웠기에, 이 갈등은 역사 속에서 ‘장미 전쟁’이라 불리게 되었다. 왕좌를 둘러싼 권력 다툼이 이어지며, 잉글랜드는 피로 물들었다.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의 기원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은 모두 플랜태저넷 왕조의 후손이었다. 랭커스터 가문은 헨리 4세로부터 왕좌를 이어받았지만, 헨리 6세의 통치 하에서 국가는 약해졌다. 반면 요크 가문은 왕위에 대한 강력한 주장을 하며 권력을 장악하려 했다. 리처드 요크 공작은 헨리 6세가 정신적 문제로 인해 통치를 제대로 하지 못하자 왕권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전쟁의 시작: 첫 번째 대결


1455년, 세인트 알반스 전투에서 요크 가문이 승리하면서 장미 전쟁의 서막이 열렸다. 이 전투는 비교적 작은 규모였지만, 그 상징성은 컸다. 요크 가문은 헨리 6세를 포로로 잡았으며, 이는 곧 요크 가문의 권력 상승을 의미했다. 그러나 랭커스터 가문은 곧바로 반격을 준비했고, 내전은 더욱 격화되었다.

역전의 연속: 웨이크필드 전투와 타우튼 전투


1460년,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리처드 요크 공작이 사망하면서 전쟁은 또 다른 국면에 접어들었다. 요크 가문의 리더가 사망하자 랭커스터 가문은 승리를 자신했으나, 요크 가문은 리처드의 아들인 에드워드 4세가 등장하며 다시 강력한 저항을 펼쳤다. 타우튼 전투에서 요크 가문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에드워드는 잉글랜드의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에드워드 4세의 즉위와 내분


에드워드 4세의 즉위는 요크 가문의 승리로 보였으나, 내부에서는 여전히 갈등이 존재했다. 특히, 그의 옛 동맹이었던 워릭 백작은 에드워드와의 갈등으로 반란을 일으켰고, 이는 다시 랭커스터 가문과의 동맹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로 인해 전쟁은 더욱 복잡해졌다.

리처드 3세의 등장과 왕좌의 마지막 대결


에드워드 4세가 죽자, 그의 아들 에드워드 5세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이내 에드워드 4세의 동생인 리처드 3세가 조카를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르게 된다. 리처드 3세는 자신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 강력한 통치를 시도했으나, 그의 지배는 오래가지 못했다. 1485년, 보즈워스 전투에서 리처드 3세는 헨리 튜더에게 패배하고 전사했다.

튜더 왕조의 시작


헨리 튜더는 헨리 7세로 즉위하며 잉글랜드 왕좌를 차지하게 된다. 그의 결혼은 요크 가문과 랭커스터 가문 간의 결합을 상징하는데, 이는 오랜 내전의 종식을 의미했다. 장미 전쟁은 헨리 7세의 승리로 끝을 맺었으며, 튜더 왕조의 시작을 알렸다.

장미 전쟁의 유산: 잉글랜드 역사에 미친 영향


장미 전쟁은 단순한 왕좌 쟁탈전이 아니었다. 이 전쟁은 잉글랜드의 정치적 구조를 크게 변화시켰으며, 귀족 계층의 힘이 크게 약화되었다. 또한, 왕권의 강화와 함께 중앙 집권화가 이루어졌고, 헨리 7세는 튜더 왕조를 통해 이 변화를 굳건히 다져나갔다. 이 전쟁은 이후 잉글랜드 역사에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영국 왕실의 정치적 다이나믹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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